뉴질랜드, 가정폭력 피해자에 10일 유급휴가 준다
뉴질랜드 의회가 세계 최초로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10일간의 유급 휴가를 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가해자에게서 떨어져 새 거주지를 찾고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뉴질랜드 의회는 25일(현지시간) 얀 로지 녹색당 의원이 2016년 발의한 이 법안을 찬성 63표, 반대 57표로 통과시켰다고 현지 뉴질랜드헤럴드가 보도했다. 법안은 내년 4월 공식 발효된다.
의회 다수당인 국민당도 처음에는 법안 통과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막판 법리 검토 과정에서 입장을 바꿨다. 중소기업의 비용 부담이 너무 커질 수 있고, 가정폭력 피해 위험이 있는 이들을 채용 과정에서 배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국민당을 제외한 뉴질랜드제일당, 노동당, 녹색당이 모두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법안이 통과됐다.
뉴질랜드에서 가정폭력은 심각한 사회문제다. 뉴질랜드 경찰이 지난 5월 공개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뉴질랜드에서는 4분에 1번 꼴로 가정폭력 신고가 접수됐다. 총 신고건수는 12만1733건에 달해 2016년 대비 3000건이 늘었다. 가디언은 “뉴질랜드는 선진국 중에서도 가정폭력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라며 “가정폭력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이 연간 41억~70억 뉴질랜드달러(약 3조~5조원)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고 말했다.
법안 통과에는 로지 의원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2011년 정계 입문 전까지 ‘여성 피난처’라는 시민단체에서 활동가로 근무했다. 이후에도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돕는 입법 활동에 매진해왔다. 그는 “이번 법안은 뉴질랜드의 고질적인 가정폭력 문제를 해결할 첫 걸음”이라며 “가정폭력 해결을 경찰에만 맡겨두어선 안된다, 사회 구성원 전체가 피해자를 돕기 위해 역할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로지 의원은 가정 폭력이 ‘일터 밖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는 “가정폭력은 일과 생활을 구분하지 않는다”며 “이미 많은 연구들이 지적했듯이 폭력적 성향이 있는 파트너들은 상대방의 일터로도 폭력을 끌어들인다. 상대방을 스토킹하거나 반복적으로 전화를 걸거나 직장 동료를 위협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부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직장에 대한 애착을 갖지 못하게 하고, 직장을 그만두거나 해고당하도록 유도하고, 그리하여 자신에게 더 의존하도록 만든다. 이는 (가정폭력 사례에서) 매우 흔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뉴질랜드헤럴드는 ‘여성 피난처’ 설문을 인용해 “가정 폭력을 경험한 이들의 60% 이상은 가해자와 관계를 맺기 전까지 풀타임 노동자였지만, 절반을 밑도는 수만 직장 생활을 계속 이어간다”고 지적했다. 찬성 측 일각에서는 이번 법안이 직원들의 퇴사율을 줄여 기업의 생산성을 높일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피해자들은 10일간의 유급 휴가 외에도 ‘유연한 노동 환경’을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된다. 근무지나 e메일 주소를 바꾸거나 회사 홈페이지에 개인 연락처를 지우도록 사측에 요구할 수 있다.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들이다.
뉴질랜드 정부는 지난 5월 가정폭력 지원단체들을 위해 8000만 뉴질랜드달러(약 612억원)의 추가 예산을 배정했다. 10일간의 가정폭력 유급휴가를 법제화한 것은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다. 지난 3월에는 호주 정부가 가정폭력 피해자에 5일간의 유급휴가를 주는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