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 은밀하게 테러 계획…51명 사망한 뉴질랜드의 실수
뉴질랜드 특검은 지난 2019년 3월 뉴질랜드 이슬람 사원에서 발생한 무차별 총격 테러를 ‘막을 수 없었던 사고’(unpreventable)로 결론 내렸다. 총격범이 범행을 계획한 흔적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허술한 총기소지 면허 관리와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에 집중된 대테러 정책의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강조했다.
지난 8일(현지시간) 뉴질랜드 특검인 왕립조사위원회(royal commission)는 지난 1년 9개월 간 진행한 ‘크라이스트 처치 총격 테러 진상 규명’ 결과를 발표했다. 80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에는 무차별 총격이 어떻게 일어났고, 미리 차단할 기회가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총격범 브랜턴 태런트(29)가 2017년부터 범행을 준비했지만, 단독으로 비밀스럽게 움직였다고 밝혔다. “주변 사람도, 정보기관도 이상 징후를 포착할 수 없었다”며 “태런트가 범행 직전 영상으로 자신의 계획을 밝힌 마지막 8분이 그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정보기관의 실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위원회는 총기 소지 면허 취득 과정의 허술한 관리 체계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만 집중된 대테러 예산을 문제로 지목했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보고서 내용을 인용해 “위원회는 두 사안이 총격을 멈출 수 있었던 직접적 원인으로 지목하진 않았지만, 정부의 실수로 수많은 생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정부를 대표해 사과한다”고 말했다.
2년 전부터 은밀하게 준비
앞서 태런트는 법정에서 자신을 백인우월주의자라고 밝히며 비디오게임 ‘포트나이트(Fortnite)’를 통해 훈련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태런트는 아동기에 접한 인터넷으로 사회를 배웠다. 6~7세부터 비디오 게임과 불법 사이트 등에 접속했고, 인종차별 발언도 자주 했다. 청소년기에는 강박적인 운동으로 50㎏을 감량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2009년부터 2011년까지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그래프턴의 한 피트니스 클럽에서 개인 트레이너로 일했다. 부상을 당해 일을 그만둔 그는 2010년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33만9000달러(약 3억6000만원)를 들고 세계 여행을 떠났다.
인도, 중국, 러시아, 북한, 아프리카와 유럽 국가를 여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호주 ABC 방송은 북한 양강도의 삼지연 대기념비에서 단체 관광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태런트가 뉴질랜드로 건너 온 건 2017년이다. 위원회는 태런트가 뉴질랜드로 이주할 때부터 범행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체육관에서 체력을 키우고, 소총 동호회에서 꾸준히 사격을 연습했다. 자신의 범행 계획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를 싫어했지만, 의심을 피하기 위해 피상적인 만남은 이어갔다. 대신 인터넷 토론 게시판과 유튜브를 통해 정보를 얻었다.
총상 입고 병원 치료, 불법 약물 투약도
태런트는 범행 당시 반자동 소총 2정과 산탄총 2정 등 총 5정의 총기를 사용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약 150만 정의 총기가 개인 소유로 등록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총기를 소유한 태런트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는 총기와 약물로 몇 차례 위기를 겪었다. 2018년 오른쪽 눈과 허벅지 총상을 입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당시 그는 “집에서 총을 닦다가 실수로 총을 발사했다”고 둘러댔다. 병원은 수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단순 부주의로 판단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또 불법으로 항염증제인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고, 남성호르몬의 일종인 테스토스테론 주사도 맞았다. 보건당국은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복통 치료의 하나로 보고 경찰에 보고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정보기관의 두 가지 실수
이번 조사에서는 총기소지 면허심사 과정의 허술함도 드러났다. 뉴질랜드에서는 총기를 소유하기 위해 두 명의 증인과 함께 경찰 인터뷰 심사를 받아야 한다.
태런트도 친구의 아버지와 온라인 게임에서 만난 또 다른 친구를 증인으로 세웠고, 별다른 제재 없이 면허를 취득했다. 이와 관련 앤드류 코스터 경찰청장은 “총기소지 면허심사와 관련해 더 철저한 조사가 필요했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와 함께 뉴질랜드 보안정보국의 대테러 정책 예산이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추적에 쏠려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편향된 예산 편성으로 백인우월주의자 등 극단 세력의 위협이 간과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위원회는 정보기관의 실수가 이번 사건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라며 “태런트가 범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만한 징표가 없었다는 게 참사를 막지 못한 결정적 원인”이라고 강조했다.
태런트는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처치의 이슬람 사원 2곳에서 총기를 무차별 난사했다. 범행 장면을 페이스북 라이브로 17분간 생중계하기도 했다. 이 사고로 모두 51명이 목숨을 잃었고, 뉴질랜드 정부는 반자동 소총 판매를 금지하는 등 총기 규제를 강화했다.
지난 8월 뉴질랜드 법원은 태런트에게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태런트는 재판 과정에서 테러 혐의를 시인하면서도 “필요한 일을 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