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과학에 환멸” 뉴질랜드로 떠나는 美 의료진들
“美 정부, 과학적 근거 무시하고 안전조치 조롱”
“사업장과 당국에 마스크 착용 등 강조해도 무시”
과학자·의학계 존중하는 뉴질랜드로 이민 행렬
“코로나 사태로 드러난 미국의 거대한 반(反)과학 철학에 환멸을 느꼈다.”
최근 뉴질랜드로 이민을 선택한 주디 멜린크 의학박사는 12일(이하 현지시각) 미 경제전문매체 CNBC와 인터뷰에서 “코로나 사태가 발생한 이후 중국 우한의 바이러스 초기 보고서를 읽고 의료진에 대한 개인보호장비(PPE) 제공과 마스크 착용 의무화 필요성을 여러차례 주장해왔지만 변화가 없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캘리포니아주(州) 앨러미다카운티에서 수석 법의학자로 근무했던 멜린크 박사는 올해 3월부터 넉달 간 사업장과 보건당국에 개인 위생 조치를 지켜달라고 요청했었다. 코로나 확진자를 치료하는 의사나 간호사가 감염될 경우 병원마저 집단 감염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특히 체온검사와 마스크 의무 착용 등 시스템 구축을 요구했지만 관련 조치들은 제대로 취해지지 않았다.
그는 “정치권이 마스크 착용을 조롱하고 많은 사람들은 과학자들의 경고를 무시했다. 당장 나 자신과 가족의 안전이 위협받는다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며 “반면 뉴질랜드 정부는 과학을 훨씬 더 존중할 줄 안다. 마침 이주 기회를 제공한다는 정보를 얻고 결국 이민을 결심하게 됐다”고 했다. 멜린크 박사는 현재 뉴질랜드 웰링턴 시티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CNBC는 코로나 대유행을 계기로 멜린크 박사처럼 뉴질랜드 이주를 계획하는 미국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 세계 의사들의 장·단기 채용을 지원하는 업체인 글로벌메디칼 스태핑의 대변인은 코로나 사태 이후 미국을 떠나 뉴질랜드 병원에 지원하려는 의사들의 문의가 폭증했다고 밝혔다.
미주리주에서 소아과 의사로 근무하던 존 다니엘도 올해 8월 뉴질랜드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소셜미디어에 이민 결정 사실을 공개한 직후 동료 7명으로부터 관련 문의를 받았다고 했다. 다니엘은 “코로나가 계속될수록 이민을 결정하는 사람은 늘어날 것”이라며 “미국은 전염병을 과학적으로 받아들인 나라로 전문직 종사자들이 이탈하는 사태를 겪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뉴질랜드 보건부는 지난 7일 코로나 지역사회 감염자 6명 등 9명이 모두 회복해 이날 기준 지역사회 감염자가 한 명도 없다고 밝혔다. 지난 6월 초 코로나 퇴치를 선언했던 뉴질랜드는 8월 중순 오클랜드 지역에서 다시 감염자가 나오자 코로나 경보단계를 높여 주민들의 사회활동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등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반면 연방정부가 코로나 대응을 주정부 자율에 맡긴 미국에서는 21만5000명 이상이 바이러스로 사망했다. 일부 주는 최근 코로나 확진세에도 불구하고 제한조치를 해제했다. 12일 기준 백악관에서 코로나 확진 전력이 있는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포함해 37명이 넘는다.
CNBC는 트럼프 대통령과 보수 진영 지지자들이 과학자들을 조롱하고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의무화를 무시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마스크 착용을 강조한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국장을 공개적으로 비하해 전문가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러면서 “재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과학자들과 의학 전문가들을 공개적으로 칭찬함으로써 코로나 방역에 대중이 하나가 되도록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했다.
코로나 국면에서 오리건주를 떠나 뉴질랜드로 이민을 선택한 라이언 라데키 응급의학과 의사는 뉴질랜드의 의학 시스템 역시 이민자에게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 상황에서 뉴질랜드의 대응을 유심히 지켜봤다”며 “자격 경력만 제대로 증명하면 이 곳에서 비교적 어렵지 않게 환자를 진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는 11월 미 대선 결과에 따라 귀국 시점을 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라데키는 “미국에서 더 많은 돈을 썼지만 감염 위험에 노출됐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며 “이곳에 얼마나 더 머물지는 미국 선거 결과에 달려있다. 바이러스에 대한 미국인들의 잘못된 태도가 매우 우려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