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5만명 귀국 행렬, 방역 잘하니 인재들 돌아오네…
호주 영국 홍콩 미국 등서 일하던 전문직 종사자들 잇단 귀국
원격 근무가 해외 일자리를 뉴질랜드로 가져오기도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국경 문을 닫고 뉴욕시가 봉쇄됐던 지난 3월, 20만 달러(약 2억300만원)의 연봉을 받으며 뉴욕 한 로펌에서 일하던 뉴질랜드인 한나 레이드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레이드는 컬럼비아대 로스쿨에도 다니고 있었다.
레이드는 “코로나19로 건강상의 위협이 닥치자 뉴욕의 높은 연봉이 갑자기 매력적이지 않게 느껴졌다”면서 “코로나에 대응하는 미국의 방식을 보고 귀국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지금은 안심하고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오클랜드의 로펌에서 새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영국 BBC는 7일(현지시간) 모범 방역국가로 불리는 뉴질랜드가 코로나19로 ‘우수인력의 귀환’이라는 예상치 못한 수혜를 입고 있다고 보도했다.
뉴질랜드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통계 기준 해외 거주 인구 2위 국가라는 점에서 지금의 현상은 더욱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다. 뉴질랜드 국민 중 해외에 살고 있는 국민은 60만~100만명으로 국내 거주 인구가 500만명인 것과 비교했을 때 높은 비율이다.
그간 뉴질랜드인들은 비자 없이도 일할 수 있는 호주, 또는 영국·홍콩·미국·싱가포르·두바이 등에 거주하면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가운데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유수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들도 많다. 하지만 런던을 비롯한 세계 대도시가 코로나19로 위기에 몰리면서 뉴질랜드로 되돌아오는 인구가 늘고 있다.
BBC는 “세계 어떤 나라도 이런 수준의 ‘팬데믹 역이민’을 경험하고 있지 않다”면서 “코로나19를 잘 통제한 뉴질랜드는 해외의 자국민들에게 귀국해서 안전을 누릴 것을 장려하고, 팬데믹으로 인한 세계 주요 대도시의 일자리 감소와 여행 제한은 뉴질랜드인들의 귀국에 힘을 보탰다”고 분석했다.
올해 들어 지금까지 귀국한 뉴질랜드인은 5만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오클랜드 매시대의 사회학자 폴 스푼리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뉴질랜드인들이 귀국할지 예상하긴 어렵지만 최대 10만명 또는 해외 거주 인구의 10% 가량은 돌아올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면서 “팬데믹이 얼마나 길어질지, 경제 위기가 얼마나 계속될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 상황이 수개월 이상 지속된다면 귀국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통제됐을 때 다시 국민들이 해외로 향하지 않게 하는 게 뉴질랜드 정부의 과제다. BBC는 “돌아온 인재들로부터 진정으로 혜택을 받으려면 그들을 장기적으로 국내에 거주하게 해야 한다”면서 “해외 경험에 대한 욕구가 강한 엘리트들이 뉴질랜드의 작은 노동시장에 머무르지 않으려고 할 수 있다”고 짚었다.
뉴질랜드인들의 꾸준한 이민은 ‘우수 인력 가뭄(brain drain)’으로 불려왔다. 뉴질랜드의 연간 이주 인구는 5만6000명 수준, 지난해 기준 뉴질랜드인의 27%는 해외에서 태어났다.
‘더 나은 삶: 이민, 웰빙 그리고 뉴질랜드’의 저자 줄리 프라이는 “해외에서 기술과 네트워크를 쌓은 우수 인력이 돌아오면 뉴질랜드에 확실히 이익이 될 것”이라면서 “지금의 역이민은 뉴질랜드가 다른 지역과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귀국한 전문직 종사자들이 해외 경험을 빠르게 공유하고 국내에 멘토링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로 돌아온 사람들이 국내에서 일자리를 찾았는지를 집계한 자료는 아직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전의 일터로 돌아가거나 해외 경험을 활용해 새로운 일을 시작한 사례가 목격됐다고 매체는 전했다. 원격 근무의 확산이 해외 일자리를 뉴질랜드로 가져오게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레이드는 “귀국한 친구 중 한 명이 오클랜드에 있는 집에서 런던 로펌의 일을 하고 있다”면서 “많은 회사에서 원격 근무가 보편화되고 있다. 안전한 뉴질랜드에서 그런 이점을 누릴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귀국하는 모든 사람들이 즉시 일자리를 찾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이 국내로 유입함으로써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프라이는 “귀국한 사람들은 살 곳을 구하고 물건을 사야하며 학교, 병원 등을 필요로 할 것”이라면서 “전반적으로 수요가 증가하면 다른 뉴질랜드인들이 할 일이 생기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코로나19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온 일부 젊은이들은 다시 해외로 떠나고 싶어한다. 팬데믹이 캐나다를 덮쳤을 때 스키 시즌을 즐기고 있었던 마레아 맥마흔은 웰링턴으로 돌아와 지역 자선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오페어(현지 가정에서 아이들의 보육을 도우면서 급여를 받고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일)로 일한 경험이 있는 뉴욕에서 공부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맥마흔은 “곧 뉴질랜드를 떠날만큼 어리석지는 않다”면서도 “안전해지면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팬데믹이 끝난 후 상황이 어떻게 될지 예측하긴 어렵다. 스푼리는 “고국으로 의무적으로 돌아오도록 할 경우 사람들은 분노하고, 다시 떠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면서 “그러나 현재 귀국한 뉴질랜드인들은 국가에 자부심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국내에 머무르며 생활을 지속하도록 설득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